소설로 읽는 亞 상업용 부동산④투명한 그림자 '홍콩', 비워진 시장

2025년 홍콩은 자본과 자유, 불안과 냉정이 교차하는 도시입니다. 이번 편의 주인공은 영국식 억양을 가진 20대 후반 홍콩 여성 '리안'. 흔히 볼 수 있는 고학력 커리어우먼으로 보이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균열이 숨겨져 있습니다. 외자 유치 협상 자리에서 부딪히는 두 인물—R과 리안—의 대화를 통해, 글로벌 오피스 시장의 변곡점에서 일어나는 내적 갈등을 들여다봅니다.
홍콩국제공항. 2025년 7월.
R은 짙은 회색 셔츠에 밝은 아이보리색 팬츠를 입고, 익숙지 않은 여름 습도 속에서 걸음을 재촉하던 참이다. 이번 출장에서 홍콩의 대형 오피스 빌딩 인수 가능성을 검토해야 했다. '스퀘어'는 홍콩 부동산 시장 침체를 반등의 기회로 보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자사 상업용 부동산 분석 툴 'RA'가 제시한 긍정적 전망을 현장에서 확인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캐리어를 한 손으로 끌며 게이트를 빠져나오던 R은 무심코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고, 그 순간 부딪힌 것이다.
"Watch it—!"깔끔한 베이지 셔츠와 검은 슬랙스, 매끈한 숏컷 헤어스타일에 아이보리색 스트랩 샌들을 신은 여자가 발등을 움켜쥐듯 구부정한 자세로 낮은 탄성을 뱉었다. R의 캐리어 바퀴가 정확히 그녀의 오른발등을 스친 모양이었다.
그녀가 R을 살짝 올려다봤다. 또렷한 쌍꺼풀, 살짝 올라간 눈꼬리, 정돈된 눈썹.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눈동자는 묘하게 흐렸다. 손목에는 금빛이 바랜 얇은 체인이 흔들렸다.
"아... Sorry, 진짜 미안합니다."
그녀는 R을 찬찬히 내려다보다가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당신, 한국 사람이죠?" "네?"
"Accent. 영어, 한국식이에요." 그녀는 발등을 톡톡 두드리더니 고개를 돌려 사라졌다. 말없이 떠나는 뒷모습은 당황스럽도록 또렷했고, R은 당황해 서 있던 자리에 멈춰섰다.
그날 오후, R은 센트럴의 한 오피스에 도착했다. 과거 갤러리로 쓰였다는 이곳은 인수 검토 대상 물건 중 하나였다. 이제 절반 이상이 비어 있었고, 로비에는 부식된 스프링클러가 나뒹굴고 있었다. 창밖으로 IFC가 보였다. 반짝이는 유리창과는 대조적으로, 이 건물은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었다.
발소리가 울렸다. 낮고 단정한 힐 소리.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스퀘어에서 오신 분 맞죠?"
그녀였다. 공항에서 발등에 아픔의 먼지를 묻혔던 그 여인. 그녀는 깔끔한 셔츠에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한 로우번, 그 속에서도 여전히 단단해 보였다.
"그쪽 발등에 내 캐리어가..." R이 입을 열었다.
"우리 구면이죠?" 그녀는 쿡 웃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약간 흐트러졌다.
"저는 리안입니다. 홍콩 투자유치청 산하 부동산협력팀의 실무 담당자예요. 오늘부터 3일간 귀사의 투자 검토를 지원하도록 배정받았습니다."
공식 명함에는 '부동산 정책 협의 담당자'라는 표기가 있었다.
"원래는 팀장님이 오실 예정이었는데, 급한 일정 변경으로 제가 대신 왔어요. 아시겠지만, 저희 부서는 외국인 투자자 유치가 주 업무입니다. 오늘과 내일, 제가 당신을 안내하겠네요."
R은 끄덕였다. 공항에서의 우연한 충돌이, 이런 형태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묘한 운명의 장난 같았지만, 어쩐지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차가운 첫인상과 달리, 방금 보인 웃음에는 묘한 친근함이 배어 있었다.
IFC 인근에서 시작된 현장 투어는 리안의 주도로 이어졌다.
"올해 A급 오피스 공실률, 13.3% 넘었어요. 임대료도 연말까지 5%는 빠질 전망이죠."
리안은 무심한 듯한 말투로 차 안에서 종일 데이터를 내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설명은 단순한 숫자 나열이 아니었다. 매 물건마다 그 건물의 역사와 과거 거쳐간 임차인들의 이야기를 곁들였다.
"이 빌딩은 90년대 말 지어졌어요. 당시엔 골드만삭스가 통째로 빌렸죠. 지금은 절반이 비었고요."
어느새 세번째 방문지. 완공되지 않은 복합개발 프로젝트 현장. R은 벽에 기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다른 투자자들도 다 이런 표정이에요."
리안은 마시던 생수병을 건네며 말했다. 처음으로, 목소리에 온기가 섞여 있었다. "힘든 도시죠?"
"아니요. 솔직한 도시요."
그녀는 R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미소 지었다. 그제야 처음으로 그녀의 웃음이 진심처럼 느껴졌다."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좋은 면만 보려고 해요. 숫자가 좋으면 그만이죠. 당신은 좀 다르네요."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완차이 인근의 빌딩 옥상에 서 있었다. 리안은 건물 열쇠를 허리춤에서 꺼내 보여줬다. 이 빌딩도 매각 대상이었고, 잠정 보류된 상태였다.
"나는 이 도시가 싫기도 해요." 그녀의 말은 바람처럼 흘렀다.
"왜요? 외자 유치가 주 업무라면서요."
"바로 그래서요. 이 도시는 늘 외부 자본으로 움직였어요. 영국 시절부터, 중국 반환 이후까지. 이제는 당신네 같은 아시아 자본이 들어오겠죠. 하지만 홍콩 사람들은... 우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R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그녀의 옆에서 야경을 바라보았다. 홍콩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수많은 불빛들, 반짝이는 빌딩들. 하지만 그 안엔 많은 균열이 번져 있었다.
"겉만 빛나요. 안은 텅 비었어요. 공실률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 마음도 공실이죠."
다음 날, R은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RA를 꺼내 들었다. 그의 회사 '스퀘어'의 자랑인 아시아 상업용 부동산 분석 툴이었다.
"또 그거에요?" 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현장감각이 먼저예요. 이 도시, 숫자보다 리듬이 더 중요하죠."
그녀의 말에 R은 잠시 손을 멈췄다. 어느새 그도 데이터에만 의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틀간 함께하며 리안이 보여준 홍콩은, 스크린 속 차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살아 숨쉬는 도시의 맥박이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R이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본사 보고서는..."
"그럼 둘 다 담으세요. 데이터와 현장감각. 그리고 이 도시의 진짜 이야기도요."
그 순간 둘 사이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작지만 선명한 이해의 순간이었다.
"왜 이렇게 솔직하게 보여주는 거죠? 다른 담당자들은 장점만 부각하려고 하잖아요."
리안은 잠시 먼 곳을 바라보다가 답했다."진짜를 보고 투자하는 사람들이 남아야, 이 도시도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단기 차익만 노리는 투자자들 때문에 너무 다쳤어요, 우리는."
그날 밤, 리안은 먼저 돌아갔고, R은 호텔에 남아 RA를 다시 열었다. 예측 모델은 여전히 '긍정'으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더 이상 숫자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보고서에는 리안이 보여준 홍콩의 진짜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귀국 직전, 두 사람은 공항에서 다시 마주섰다. 이번엔 어떤 충돌도 없었다.
"홍콩의 여정은 마음에 들었나요?"
R은 고개를 끄덕였다. "빛나더군요. 당신처럼, 내내."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빛 안에서 균열을 봤어요. 예전처럼 데이터만 보고 판단하기는... 어렵겠죠."
"그래도 투자하실 건가요?"
"네. 하지만 다르게요. 장기적으로, 이 도시와 함께 성장하는 방식으로."
리안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번엔 마음에서 우러난 미소였다.
비행기 이륙 전, R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수천 개의 불빛들, 그 사이사이로 보이지 않는 균열들. 그리고 떠오르는 것은, 리안의 손목에서 가만히 흔들리던 바랜 금빛 체인의 잔상이었다. 작은 장신구처럼, 이 도시는 낡았지만 여전히 단단한 매력을 품고 있다.
그의 보고서 제목은 정해져 있었다. '투명한 그림자, 홍콩 - 비워진 시장에서 찾은 새로운 가능성'
2025년 홍콩 상업용 부동산 시장 5가지 주요 이슈
1. 공급 증가와 공실률 부담 : 오피스 및 상업용 건물의 신규 완공 물량이 크게 증가할 전망입니다, 특히 야우침몽 등 특정 지역에 집중될 예정입니다. 2024년 말 기준 공실률이 11.8%에 달해, 공급 과잉에 따른 공실 부담이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2. 임대료 및 자산가치 하락 : 수요 부진과 공급 과잉, 그리고 미중 무역 긴장 등 외부 요인으로 인해 임대료와 자산가치가 하락세입니다. 소매 매장 임대료와 가격도 각각 6.5%, 18.2% 하락했습니다.
3. 금리 인하와 금융 유동성 변화 : 미국과 홍콩의 기준금리 인하가 이어지면서 차입 비용이 낮아지고, 부동산 거래 및 시장 심리가 점진적으로 회복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하지만 금융 유동성 경색은 여전히 리스크 요인입니다.
4. 정부의 정책 지원 및 규제 완화 : 홍콩 정부는 모기지 한도 완화, 젊은 층 주택 구매 지원 등 다양한 부동산 시장 활성화 정책을 추진 중입니다. 이러한 정책은 시장 안정화와 수요 회복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5. 지정학적·글로벌 경제 불확실성 : 미중 무역 분쟁, 글로벌 통화정책 변화, 지정학적 긴장 등 외부 환경의 불확실성이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 지속적인 하방 압력으로 작용 중입니다.
작가의 해설 : 4화는 홍콩의 외형적 화려함과 내면의 균열을 포착합니다. 2025년의 홍콩은 상업용 부동산 신규 공급이 급증한 반면, A급 오피스의 공실률은 13%를 넘어섰고, 임대료는 하락세입니다. 야우침몽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과잉 공급, 글로벌 금리 환경의 불확실성, 리테일 수요의 위축, 2026년 공급 급감에 따른 시장 불균형은 도시 전반에 중첩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소설은 R이 겪는 도시 체험과 그 안에서 만난 인물 ‘리안’을 통해 숫자 너머의 도시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리안은 데이터상 ‘하락’이라 쓰인 도시 속에서도 자신만의 ‘이유 있는 균형’을 유지하는 홍콩인입니다. RA로 예측된 홍콩 시장의 ‘긍정적 전망’과 현장에서 만난 ‘정서적 현실’ 사이의 괴리, 이 틈을 감각적으로 헤쳐 나가는 여정은 상업용 부동산이 단지 자산이 아니라, ‘사람과 기억의 밀도’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 인물 소개 'R' : 한국의 상업용 부동산 데이터 기반 스타트업 '스퀘어'의 전략총괄 이사. 분석 솔루션 RA를 신뢰하며 아시아 곳곳을 누비는 실무형 전문가다. 하지만 도시를 깊게 경험할수록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이면에 눈을 돌리게 되고, 홍콩에서는 그 균열이 유독 선명하게 다가온다. R은 완벽한 예측보다는 균열의 패턴을 찾는 데 집중하며, 이번 홍콩 출장에서는 뜻밖의 사건과 인물을 통해 ‘실제 투자 판단’보다 중요한 어떤 감정적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 인물 소개 '리안' : 홍콩 투자유치청 산하 부동산 협력팀 실무담당자. 싱가포르나 도쿄의 깔끔한 전문가들과는 달리, 리안은 도시의 균형과 균열을 모두 품고 있는 인물이다. 짧은 숏컷에 정제된 옷차림, 단단한 눈빛과 낮은 음성의 말투는 철저하게 계산된 듯하지만, 손목에 걸린 바랜 금빛 체인처럼 오래된 감정과 기억이 흔들린다. 그녀는 R에게 홍콩의 건물과 시장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과거와 마음을 내보인다. 차가워 보이고, 때로는 유쾌하지만, 그녀의 모든 태도는 홍콩이라는 도시 그 자체의 이중성에 빗대어 읽힌다.